
JOKER조커
왜 이 영화는 걸작인가 — 정신분석으로 읽는 아서 플렉의 붕괴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웃는다."
2019년 개봉한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는 단순한 슈퍼빌런 기원 서사가 아니다. 이 영화는 한 인간이 어떻게 사회의 균열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폭력과 해방을 동일시하게 되는지를 치밀하게 해부한다. 프로이트의 무의식론, 라캉의 상징계 이론, 에릭슨의 자아 발달 단계를 렌즈로 삼으면, 이 영화가 왜 단순한 오락을 넘어 우리 시대의 심층을 건드리는 걸작인지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아서 플렉은 실패한 코미디언이며, 정신질환자이며, 학대 피해자이며, 사회적 투명인간이다. 그의 이야기는 불편하다. 관객이 그에게 동정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의 불안과 억압된 분노를 직면하게 된다. 바로 그것이 이 영화가 걸작인 이유다.
억압과 귀환 —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스크린을 걷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의식, 전의식, 무의식이라는 세 층위로 구분하였다. 그 중 무의식은 용납될 수 없는 욕동과 외상적 기억이 억압된 공간이며, 이것이 언제나 의식의 표면으로 귀환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조커》는 이 메커니즘을 거의 교과서적으로 시각화한다.
아서 플렉의 병적 웃음(pseudobulbar affect)은 단순한 신경학적 증상이 아니다. 영화 안에서 그것은 억압된 고통이 왜곡된 형태로 귀환하는 프로이트적 '증상(symptom)'의 완벽한 표상이다. 아서는 슬프거나 두려울 때 웃음이 터져 나온다. 즉, 그의 진짜 감정은 억압되어 있고, 그 자리를 웃음이라는 기이한 대체물이 채운다. 사회가 그에게 허용한 감정 표현의 공간이 '웃음'뿐이었기 때문이다 — 그는 광대이므로, 늘 웃어야 하니까.
프로이트는 말했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귀환한다. 아서의 웃음은 그 귀환의 얼굴이다.
어머니 페니 플렉과의 관계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대상관계이론의 관점에서 분석할 때 더욱 복잡해진다. 아서는 어머니를 돌보면서도 그녀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 어머니는 그에게 "너는 이 세상에 행복을 가져다줄 존재"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이것은 사랑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서를 자신의 욕망 충족 도구로 삼는 나르시시즘적 투사다. 아서는 어머니의 시선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왔다. 그 환상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 — 어머니가 그를 학대하고 방치했다는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 아서의 자아는 완전히 붕괴한다.
프로이트의 '원초적 장면(primal scene)' 개념도 이 영화에서 작동한다. 아서가 어린 시절 겪은 외상 — 어머니의 남자친구에게 학대받고, 머리를 바닥에 찧힌 기억 — 은 그의 무의식 깊은 곳에 새겨진 원초적 상처다. 그는 이것을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상처는 매 순간 그의 행동과 정서 반응을 지배한다. 뇌 손상으로 인한 웃음 발작도, 사실은 이 외상의 신체화된 흔적이다.
억압(Repression) · 증상(Symptom) · 외상(Trauma) · 귀환(Return of the Repressed) · 대상관계(Object Relations) — 아서 플렉의 모든 행동은 이 다섯 개의 개념으로 수렴된다.
결정적으로, 영화는 아서의 상상과 현실을 의도적으로 뒤섞는다. 소피와의 로맨스는 전부 망상이었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소망 충족(wish fulfillment)'의 병리적 형태다. 아서는 현실에서 결코 얻을 수 없는 친밀함과 인정을 환상 속에서 충족한다. 그리고 그 환상이 현실 앞에서 무너질 때, 남는 것은 오직 폭력뿐이다.
거울 단계의 붕괴 — 라캉의 상징계, 그리고 타자의 욕망
자크 라캉은 인간이 '거울 단계(mirror stage)'를 통해 자아를 형성한다고 말했다. 아이는 거울 속 자신의 이미지를 보며 통합된 자아를 구성한다. 하지만 그 자아는 언제나 허구다 — 타자의 시선을 통해 구성된 허상이기 때문이다. 라캉은 인간이 '대타자(the Other)'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전에, 타인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욕망한다.
아서 플렉의 비극은 바로 이 '대타자'가 철저히 부재하거나 적대적이라는 데 있다. 머레이 프랭클린은 아서가 유일하게 인정받고 싶었던 상징적 아버지다. 텔레비전 속 머레이는 아서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준다. 아서는 그를 아버지처럼 여기고, 그의 쇼에 나가 인정받는 것을 꿈꾼다. 그러나 머레이는 아서의 영상을 조롱거리로 방송하고, 결국 쇼에서도 그를 우스갯거리로 소비한다.
라캉적 의미에서, 머레이를 향해 당긴 방아쇠는 대타자의 살해다. 인정을 거부한 상징 질서 전체에 대한 복수.
영화의 핵심 장면 중 하나는 아서가 머레이에게 말하는 대목이다. "나는 내가 비극이길 바랐는데, 당신들은 나를 코미디로 만들었다." 이것은 단순한 대사가 아니라, 라캉이 말한 '인정투쟁(struggle for recognition)'의 파국적 결말이다. 아서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정의받으려 했다. 그러나 고담 시의 모든 타자는 그를 투명인간 취급하거나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
라캉의 또 다른 개념인 '실재계(the Real)'는 이 영화에서 폭력으로 나타난다. 상징계 — 언어, 사회 질서, 규범 — 가 아서를 포섭하는 데 실패했을 때, 그 균열 사이로 실재계가 터져 나온다. 지하철 살인, 어머니 살해, 머레이 사살. 이 폭력들은 모두 상징계의 실패가 만든 공백에서 솟아오른 실재계의 귀환이다.
더 나아가, 영화는 아서가 '조커'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는 순간 상징계와의 관계가 역전됨을 보여준다. 이전의 아서는 상징계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구걸하던 존재였다. 하지만 조커는 상징계의 바깥에 서서 그것을 조롱하는 존재가 된다. 가면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면을 벗는 것이다. 아서 플렉이라는 허구적 자아를 버리고, 억압된 욕동의 직접적 표현으로서의 조커가 된다. 라캉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상징계의 요구에 응하는 것을 멈추고 '충동(drive)'에 몸을 맡긴다.
거울 단계(Mirror Stage) · 대타자(the Other) · 인정 욕망(Desire for Recognition) · 상징계(Symbolic Order) · 실재계(the Real) · 충동(Drive)
고담 시라는 공간 자체도 라캉적으로 읽힌다. 도시의 쓰레기 파업, 빈부 격차, 부패한 정치 — 이것은 상징계 자체가 이미 허구이며 균열투성이임을 드러낸다. 아서의 광기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이미 병든 상징계의 증상이다. 영화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가 여기 있다. 조커가 옳은 것이 아니라, 조커를 만들어낸 세계가 문제라는 것을 우리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 위기의 완성 — 에릭슨의 발달론과 사회적 배제의 심리학
에릭 에릭슨은 인간의 자아 발달을 8단계로 구분했다. 각 단계는 핵심 갈등을 포함하며,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심리적 장애가 축적된다. 아서 플렉의 삶은 이 8단계 중 거의 모든 단계에서 실패한 사례다.
유아기의 '신뢰 대 불신' 단계에서 아서는 어머니에게 학대받고 방치됨으로써 기본적 신뢰를 형성하지 못했다. 아동기의 '주도성 대 죄책감' 단계에서는 자신의 행동 결과에 대해 일관된 피드백을 받지 못해 정서적 조율 능력이 발달하지 않았다. 청소년기의 '정체성 대 역할 혼란' 단계는 아서의 비극이 가장 집약된 지점이다. 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끝내 답하지 못한 채 성인이 되었다.
에릭슨에 따르면 정체성을 찾지 못한 인간은 '역할 혼란' 속에서 표류한다. 아서 플렉의 40년 인생이 그 표류였다면, 조커는 그 표류가 만든 섬이다.
영화의 중반부에서 아서는 일기장에 이렇게 쓴다. "내 인생에서 내가 죽어도 슬퍼할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죽으면 오히려 더 눈에 띌 것 같다." 에릭슨의 관점에서 이것은 '친밀감 대 고립' 단계의 완전한 실패를 나타낸다. 인간은 타인과의 진정한 친밀감을 형성할 때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한다. 아서는 그 어떤 진정한 관계도 맺지 못했다. 소피는 환상이었고, 동료들은 그를 배신했으며, 어머니는 가해자였다.
사회심리학적으로도 이 영화는 매우 정교하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말한 '아노미(anomie)' — 사회적 규범이 붕괴하고 개인이 공동체로부터 소외되는 상태 — 가 고담 시 전체를 지배한다. 아서는 그 아노미 속에서 정신의학적 지원도 끊기고, 직업도 잃고, 사회적 연대의 모든 끈이 끊어진다. 이 순간 개인은 두 가지 선택을 한다 — 자멸하거나, 폭발하거나. 아서는 후자를 선택한다.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 · 역할 혼란(Role Confusion) · 아노미(Anomie) ·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 · 자기대상(Self-Object) 실패
하인츠 코헛의 자기심리학(Self Psychology)은 이 영화를 이해하는 또 다른 강력한 렌즈를 제공한다. 코헛은 인간이 건강한 자아를 발달시키기 위해 '자기대상(self-object)' — 자신을 거울처럼 반영해주고, 이상화할 수 있는 타인 — 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서의 삶에는 이 자기대상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어머니는 거짓된 거울을 제공했고, 머레이는 이상화의 대상이었지만 결국 그를 조롱했다. 자기대상이 반복적으로 실패할 때, 자아는 파편화되고 나르시시즘적 분노(narcissistic rage)가 폭발한다. 아서의 살인들은 모두 이 나르시시즘적 분노의 폭발이다.
결국 《조커》는 개인의 악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한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데 사회, 가족, 제도, 그리고 타인의 무관심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기여했는지를 정밀하게 추적한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며 느끼는 불편함은 아서에 대한 공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 자신이 그 사회의 일부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담은 픽션이지만, 아노미는 현실이다.
토드 필립스는 이 이야기를 통해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은 아서 플렉의 어느 순간에 "이건 어쩔 수 없었다"고 느꼈는가? 그 순간을 직면하는 것, 그것이 걸작과 오락의 차이다.